Erich Fromm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 하는가 -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cheese cat
2023. 12. 11. 18:15

[내용 요약]
우리는 과거의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 보다 나은 가치와 규범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거 19세기의 악덕은 1) 맹목적 복종의 요구, 2) 야만적 착취, 3) 성과 인종차별, 4) 탐욕과 축재, 5)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등이 있었다. 이런 악덕이 20세기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자.
1)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권위주의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익명의 권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그래서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 시킬 기회를 얻는 공개적 권위와 반대로, 배후에 숨어 작용하는 권위를 의미한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익명의 권위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신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 산다.
2) 자신을 위한 물질적 착취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다음세기에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착취한다.
3) 불평등은 사라지고 있지만 진정한 평등이 주어지고 있다 볼 수 있는가? 진정한 평등은 타인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착각하여, 모두에게 같은 것이 주어지며, 타인과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한다는 논리가 펼쳐지고, 이로인해 특별한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지는 획일화 현상이 있다.
4) 재산을 모으는 축재 대신 소비가 미덕인 세상이 되었다.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기에 생산적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게 된다. 사물은 생산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극도로 비생산적이다.
5) 지금은 자기중심주의와는 정반대로 사생활을 누릴 수 없는 무능력이 문제이다. 반드시 타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본문 중]
나는 수천 년 전 인류의 모든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대체로 동의하였던 삶의 기본 규범과 가치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가 뽑힌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의미를 삶에 부여할까?
사랑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이 방식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유일하게 만족을 주는 방식이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우리는 무조건 공개적 권위를 택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위는 난공불락의 철벽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기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 규칙은 드러나 있지 않아서 감으로 느끼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당혹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우리는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며, 젖병과 사과를 기다리는 영원한 신생아이다.
이제 문제는 '내 집은 내 성'이라는 태도가 아니라 사생활을 누릴 수 없는 무능력이다. 반드시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속감' '팀워크'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자신이나 이웃의 은둔을 참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는 19세기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개인주의, 자기 중심주의라 부르던 행동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